독서 - 희랍어 시간ㅣ한강

희랍어 시간을 읽고





독서 후기


 한강 작가의 '희랍어 시간' 은 단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'소설'이 아니라, 문장 하나하나를 '보는' 책이었습니다. 그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, 마치 한 점의 회화 작품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. 읽는 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느끼는 쪽을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.

 이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 작품이 일반적인 글에 가깝기 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깝기 때문일 듯 합니다. 그림에도 여러 장르가 있고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은 그 그림들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. 스케치나 팝아트를 감상하듯이 가볍고 유쾌할 때도 있습니다.

 때로는 거장의 그림 앞이나 난해한 현대 미술작품의 앞에서 심오하게 고민해야 하기도 하고 세밀화처럼 매우 가까이 들여다 봐야 그 진수를 아는 작품들도 있습니다.

 그런 점에서 한강 작가의 '희랍어 시간' 은 단순하게 '소설'이라는 장르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울 듯합니다. 때로 작가의 글은 읽는 내내 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.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 본인이 이 책을 집필할 때 단어 하나, 문장 한줄, 심지어 쉼표나 점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듭니다.

 책의 분위기는 차갑다기보다 조용하고 깊습니다. 자극적인 문장도, 극적인 전개도 없지만, 그 대신 글 너머로 묵직하게 다가오는 감정의 결이 있습니다.

 작가는 이야기를 설명하거나, 독자의 이해를 돕는 장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. 그래서 독자는 때때로 길을 잃은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. 하지만 그건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더듬더듬 나아가야 하는 삶의 한 조각 같기도 했습니다.

 저 또한 책의 절반까지 읽다가 다시 처음부터 되돌아가서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제서야 제대로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.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, 감각하고, 곱씹고, 오래 머물러야 하는 책입니다.

 전혀 다른 감상을 느끼도록 하는 그림처럼 이 책 또한 보는 사람의 깊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. '희랍어 시간'은 한글의 아름다움과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해줍니다.

 이는 읽기 편하거나 쉽지 않지만 새로운 즐거움을 줍니다. 그래서 제게 이 책은 글의 밀도를 끌어올린 한 편의 조용한 예술작품이었습니다.

 동시에 과연 글을 작가처럼 쓰는 것이 인생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. 

읽다 멈춘 문장들


"의사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, 단체생활의 자극은 그녀의 침묵에 균열을 내지 못했다."

"삐비라고 이름붙였던 우리 병아리 기억하니.
교문 앞에서 종이봉지에 담아 팔던 그 따뜻한 녀석을 내가 사들고 왔을 때, 아직 학교에 안 들어간 너는 좋아서 얼굴이 새빨개졌지. 녀석을 키워도 된다는 허락을 어머니께 받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떼쟁이인 너 덕분이었어.
하지만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우린 나무젓가락 한 짝을 분질러서, 교차되는 부분을 무명실로 친친 감아서 십자가를 만들었지."

"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.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,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,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?"

"이따금 너의 화제는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게 내 눈의 상태로, 그것과 뗴어 생각할 수 없는 장래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지. 그게 내 마음을 은밀히 다치게 한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. 명랑하게 너는 말했지. 내가 너라면, 그때를 위해 점자를 미리 배워두겠어. 흰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거리를 걷는 법도 익혀두겠어. 잘 훈련받은 멋진 리트리버를 사서 그 녀석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어."

"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'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.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.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,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.' 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,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.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,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."

"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.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.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면,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."




작성일 : 2025년 07월 05일
작성자 : Tokkipapa
웹주소 : www.tokkipapa.com

갱신일 : 갱신 없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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